inspiration

몇 페이지 10

iamsera 2018. 5. 16. 12:32


불빛에 기대고 싶어지는 날, 혼자 늦은 저녁을 먹는다. 냉장고 문을 열고, 불빛 속에 손을 넣어 둥근 반찬통을 꺼내다 말고 저 불빛들, 다 길이다. 중얼거린다. 저녁이 산을 가만히 지우는 동안 나는 아무 소리 없이 밥을 먹었다. 불비에 기대면 그늘이 된다, 어둠이 된다. 여긴 마치 물속의 밤 같아서 애초 바닥 따윈 없는지도 몰라. 그래, 그런 시절이 있었지, 두려움 따위는 집어치웠던 시절, 몸에 긴 칼자국을 그리던 겨울, 깜빡거리던 불빛 같은 핏방울로 달빛조차 붉어 보이던 창문으로 달이 지난 지 오래. 아무것도 소곤거리지 않는 참으로 편안했던 불안.


불빛에 부풀려진 영혼은 밤새 공중을 떠다니고

달빛이 얼음처럼 차가웠던 어느 날 붉고 둥그랗던 불빛을 기억한다.

그 불빛들

나무들의 손가락 사이에서 물방울처럼 흘러내렸고

아직도 무거운 외투를 걸치고 앉은 시절.


남은 반찬을 냉장고 속에 넣고, 불을 켠다. 깨알 같은 글자들로 가득한, 채송화 꽃씨보다 작고 작은 글자들이 무료한 얼굴로 쉴 새 없이 비친다. 한 시절이 가서 다시 오지 않았다.

_이승희, 시절, 불빛






늘 멀리 있어 자주 뵙지 못하는 아쉬움 남습니다 간혹 지금 헤매는 길이 잘못 든길이 아닐까 생각도 해보고요 그러나 모든 것이 아득하게 있어 급한 마음엔 한 가닥 위안이 되기도 합니다 이젠 되도록 편지 안 드리겠습니다 눈 없는 겨울 어린 나무 곁에서 가쁜 숨소리를 받으며

_이성복, 편지5






저 빗물 따라 흘러가봤으면.

빗방울에 젖은 작은 벚꽃 잎이

그렇게 속삭이다가, 시멘트 보도

블록에 엉겨 붙고 말았다 시멘트

보도블록에 연한 생채기가 났다

그렇게 작은 벚꽃 잎 때문에 시멘트

보도블록이 아픈 줄 알게 되었다

저 빗물 따라 흘러가봤으면,

비 그치고 햇빛 날 때까지 작은

벚꽃 잎은 그렇게 중얼거렸다

고운 상처를 알게 된 보도블록에서

낮은 신음 소리 새어나올 때까지

_이성복, 그렇게 속삭이다가







어제는 비가 요란스레 내렸습니다. 오늘도 내일도 비가 내릴 거라는데요, 이런 날이면 나는 나라는 사람이 지닌 온도에 대해 생각해보게 됩니다. 얼마 전에 겨우 알게 된 거지만, 내 온도는 비 오는 날의 그것과 닮은 것 같거든요. 화창한 날보단 차갑고 축축하기도 하지만, 또 너무 춥거나 덥지는 않게끔 하는, 어떤 안정감 같은 걸 지녔달까. 누군가가 보기엔, 저 사람 참 차갑게 생겼다, 참 말 없게 생겼다, 그렇게 느낄 수도 있겠습니다. 또 실제로도 그렇습니다. 나는 강아지처럼 살가운 사람이 아닙니다. 뭐라도 더 줄 수 없을까 안달이 나 있거나, 힘이 되는 말을 몇 가지쯤 외우고 다니는 사람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하지만 내게는 너무 팔랑대게 되거나 또 반대로 너무 우울해지지 않도록 잡아주는 안정감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네. 비 오는 날의 온도처럼요. 나는 신이 난 친구가 팔짝팔짝 뛰며 앞서 걸으면, 작게 미소 지으며 처넌히 뒤따르는 사람입니다. 또 평소완 다르게 눈물을 훌쩍인다면, 구태여 말을 걸지 않는 사람입니다. 그저 적당한 거리에서 해야 할 일을 하는 사람입니다. 왜 울어? 무슨 일인데 그래? 그마저도 묻지 않는 사람입니다. 슬픔이 잦아들 때까지 기다려주는 것, 고작 그게 나의 안정감입니다.

또 그런 거죠, 나는 실제로도 비 오는 날을 좋아하는데요, 하루쯤은 싫어하는 사람이 될 수도 있다는 겁니다. 비 오는 날을 너무도 싫어하는 어떤 사람, 어딘가의 당신 옆에 서고 싶습니다. 비 오는 날을 너무도 싫어하는 어떤 사람, 어딘가의 당신 옆에 서고 싶습니다. 그리곤 '비가 다 오네요.'라고 말하며 혀를 몇 번 차보는 겁니다. 그게 내가 지닌 안정감입니다. 심심하고 느긋한 안정감, 도둑질하는 고양이를 봤으면서도 모르는 척하는 시골 할머니처럼요, 딸을 기다리며 밥을 지어놓곤, 정작 딸 앞에선 자는 시늉을 하는 어느 아버지처럼요. 그래요, 이게 나의 온도입니다.

_오휘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