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nspiration

몇 페이지 9

iamsera 2018. 5. 9. 14:23


"분노는 3독 가운데 하나야."

"뭐?"

"한번 불을 붙이면 분노의 불꽃은 끊임없이 타오르다가 결국은 자기 자신까지 모두 태워버리고 말지."

"그게 무슨 뜻이야?

(중략)

"유언이라기보다 평소에 그런 말씀을 자주 하셨어. 어떤 일이 있어도 분노만은 마음 속에 품지말라고."

"그런게 가능할까? 어떻게 분노를 느끼지 않고 세상을 살아 갈 수 있지?"

"전혀 느끼지 않는 것은 무리일지도 모르겠지만, 억제 할 수는 있지 않을까?"

"그것도 쉬운 일은 아니야 애당초 그러게 하면 나쁜 녀석들한테 당하고 살 수 밖에 없잖아."

다이몬은 슈이치를 쳐다보며 온화한 미소를 지었다.

"그래도 상관없어 자신의 분노 때문에 자멸하는 것보다 휠씬 나은 삶이니까."

_기시 유스케, 푸른 불꽃





··· 하지만 우리가 다시 만날 확률이 0에 가깝더라도, 아니, '0' 그 자체일지라도, 꼭 하고 싶은 말이 있습니다. 지구상의 모든 공기가 이어져 있고, 공기의 일이 떠도는 것이라면, 언젠가 떠돌다 당신에게 닿을 공기에게라도 들려주고 싶은 말이 있습니다. 사랑합니다, 아직도 말합니다. 내 마를 들은 공기가 다른 곳의 공기들보다도 유독 느려서, 아주 천천히 떠돌다 아주 늦게 닿더라도 상관없습니다. 그때도 나의 '아직도 사랑함'은 여전히 '아직도'일 겁니다.

_오휘명, 서울 사람들





참 많은 이가 나를 보고 '넌 참 뜨거운 사람이야'라고 말하곤 했습니다. 뜨겁다 못해 불타오르는 사람 같답니다. 흐릿한 인상과는 참 다르지만, 아무튼 그렇답니다. 그중에서도 사랑하는 사람에게 내 영혼의 불은 유난히 활활 타올랐는데요, 그 마음의 주인들은 그런 내 온도를 견디지 못했고, 이내 곁에서 떠나버렸습니다. 넌 뭐든 태워 없앨 사람이라는, 뜨겁고 아픈 사람이라는 말을 뱉으면서요. 나는 그 나날들을 지내며 내 몸통 안쪽의 벽을 까맣게 태웠고, 매연 같은 기침을 오래 앓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그쪽처럼 마음의 불기운을 잘 다루는 사람이 나타나 주면, 나는 어쩔 수 없이 다시 마음에 불을 붙이게 됩니다. 산만할 정도로 신난 강아지를 차분히 쓰다듬는 손길을 보며, 그리고 마음이 아픈 이들을 잘 보듬는 그 표정을 보며 나는 사랑을 꿈꿉니다. 남들보다 따스한 손으로 그 뺨에 홍조를 만들고 싶어요. 가끔은 나 때문에 열이 올라, 땀도 조금 흘리셨으면 좋겠어요. 마음의 불쏘시개를 잘 다루는 사람, 그러니 나를 다뤄주세요. 한 사람을 위한 음식을 데우거나 차를 끓이는 온도가 여기에 있습니다. 밤길을 밝히는 불빛도 여기에 있습니다. 파랗고 빨갛게 빛나는 것이 고스란히 이 안에 있다는 말입니다. 호흡을 주세요. 그 숨이 없으면 픽 정신을 잃어버릴 것 같아요. 호흡을 주세요. 그 들숨 날숨에 존재 자체가 흔들려버려도 좋다니까요.

_오휘명, 2018년 03월 05일 16시 불





우리는 태어나지 말았어야 했다. 사랑할수록 죄가 되는 날들. 시들 시간도 없이 재가 되는 꽃들. 말하지 않는 말 속에만 꽃이 피어있었다. 천천히 죽어갈 시간이 필요하다. 천천히 울 수 있는 사각이 필요하다. 품이 큰 옷 속에 잠겨 숨이 막힐 때까지. 무한한 백지 위에서 말을 잃을 때까지. 한 줄쓰면 한 줄 지워지는 날들. 지우고 오려내는 것에 익숙해졌다. 마지막은 왼손으로 쓴다. 왼손의 반대를 무릅쓰고 왼손으로 쓴다. 되풀이되는 날들이라 오해할 만한 날들 속에서. 너는 기억을 멈추기로 하였다. 우리의 입말은 모래 폭풍으로 사라져버린 작은 집 속에 있다. 갇혀 있는 것. 이를테며 숨겨온 마음 같은 것. 내가 나로 살기 원한다는 것. 너를 너로 바라보겠다는 것. 마지막은 왼손으로 쓴다. 왼손의 반대를 바라며 쓴다. 심장이 뛴다. 꽃잎이 흩어진다. 언젠가 타오르던 밤하늘의 불꽃. 터져 오르는 빛에 탄성을 내지르며. 나란히 함께 서서 각자의 생각에 골몰할 때. 아름다운 것은 슬픈 것. 슬픈 것은 아름다운 것. 내 속의 아름다움을 따라갔을 뿐인데. 나는 피를 흘리고 있구나. 어느새 나는 혼자가 되었구나. 되돌아보아도 되돌릴 수 없는 날들 속에서. 쉽게 찢어지고 짓무르는 피부. 멍든 뒤에야 아픔을 아픔이라 발음하는 입술. 모래 폭풍은 언젠가는 잠들게 되어 있다. 다시 거대한 모래 폭풍이 밀려오기 전까지. 너와 나라는 구분 없이 빛을 꽃이라고 썼다. 지천에 피어나는 꽃. 피어나면서 사라지는 꽃. 하나 둘. 하나 둘. 여기저기 꽃송이가 번질 때마다. 물든다는 말. 잠든다는 말. 나는 나로 살기 위해 이제 그만 죽기로 하였다.

_이제니, 마지막은 왼손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