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nspiration

데미지

iamsera 2017. 4. 7. 15:37

 

pg. 5

 내면의 풍경이란 게 있다. 영혼의 지형이랄까. 우리는 평생토록 그 지형의 등고선을 찾아 헤맨다. 운이 좋아 그것을 찾는 이들은 물이 돌 위를 흐르듯 느긋하게 그 등고선 위를 올라 집에 이른다.

 어떤 이는 태어나면서 그것을 발견하는가 하면, 바싹 말라붙은 채로 바닷가 고향마을을 떠나 사막에서 상쾌함을 느끼는 이들도 있다. 시골에서 태어났다 하더라도 강력하고 분주한 도시의 고독 속에서만 안도하는 사람들도 있다.

 어떤 사람들에게는 그 탐색이 아이나 어머니, 할아버지, 형, 연인, 남편, 아내, 혹은 원수 등 다른 이의 흔적을 찾는 일이다.

 우리는 행복하거나 불행하게, 성공하거나 실패하며, 사랑받거나 사랑받지 못한 채 삶을 헤쳐 나간다. 뭔가 깨달아 온몸이 굳어버릴 듯한 충격을 느껴보지 못하고, 영혼 속에서 뒤틀린 쇠붙이가 저절로 풀어져 마침내 제자리를 찾는 고통도 느껴보지 못하고 살아갈지도 모른다.

 나는 의사로서 죽어가는 이들의 곁을 지켜왔다. 그들은 편안함을 느껴본 적 없는 세상을 떠나면서 가족의 슬픔에 어리둥절해한다.

 자식이 죽을 때보다 형제가 죽을 때 더 흐느끼는 남자들을 봤다. 그들의 존재와 얽혀 있기 때문일 것이다. 나는 신부들이 어머니가 되는 것도 지켜봤다. 그들이 눈부셨던 것은 딱 한 번, 오래전 삼촌의 무릎에 앉아 있던 때뿐이었다. 

 또 나 자신의 삶에서는 멀리 여행하며, 사랑하지만 낯선 동반자들을 얻었다. 아내, 아들 하나, 딸 하나. 나는 불만스러운 아름다움이 있는 환경 속에서 사랑을 주는 이방인으로 그들과 살아왔다. 수완 좋은 거짓말쟁이인 나는 내 존재의 껄끄러운 면을 가만히, 조용히 넘겼다. 내가 선택한 쪽으로 향하면서 어색하고 고통스러웠지만 그것을 숨겼다. 그리고 사랑하는 이들이 내게 기대하는 대로 좋은 남편, 좋은 아버지, 좋은 아들이 되려고 노력했다.

 내가 50세에 죽었다면 대단한 명성은 없어도 의사요, 자리 잡힌 정치가로 끝났을 것이다. 사회에 공헌한 사람, 그리고 슬픔에 잠긴 아내 잉그리드와 두 자녀 마틴과 샐리에게 사랑을 듬뿍 받은 사람으로 기억되었을 것이다.

 장례식에는 나보다 잘 살아 참석해준 것만으로도 나를 명예롭게 할 이들이 왔을 것이다. 또 이 비사교적인 사람을 사랑했다고 믿는 이들, 눈물로 나의 존재를 증언할 이들이 찾아왔을 것이다.

 평균 이상인 사람, 그 누구보다 세상의 축복을 흠뻑 누린 사람, 비교적 젊은 나이인 50세에 여정을 끝마쳤지만 삶의 여정이 계속되었다면 틀림없이 더 큰 영광과 성취를 누렸을 사람의 장례식이 됐을 것이다.

 하지만 나는 50세 되는 해에 죽지 않았다. 현재 나를 아는 사람은 누구나 그것을 비극으로 여긴다.

 

pg. 8

 내 유년기, 청소년기, 청년기를 장악한 사람은 아버지였다. 의지가 그의 근본 신조였다.

 "의지는 남자의 가장 큰 자산이다. 대부분 제대로 쓰지 않는 게 문제지. 모든 인생 문제의 해결책이란다."

 귀에 못이 박히게 들은 말이었다.

 자기 삶을 주도할 능력이 있다는 굳은 믿음과 큰 키에 건장한 체격까지 더해져 그를 비할 데 없이 강한 인물로 만들었다.

 아버지의 이름은 톰이었다. 그가 세상을 떠나고 세월이 흐른 오늘날에도 나는 톰 같은 인물을 만날 때마다 강한 성격을 떠올린다.

 아버지는 할아버지에게 소규모 식료품 사업을 물려받아 소매점 체인으로 키웠고, 덕분에 부자가 되었다. 하지만 그는 어떤 직업을 선택했든지 성공했을 것이다. 목표 달성에 의지를 행사해서 틀림없이 성취하고 말았을 테니까. 

 (중략)

 하지만 불확실성이나 유쾌한 실패에 대해서는? 그의 의지에 복종당한 다른 사람들의 의지는? 그 생각은 못 해봤을 것이다. 냉담하거나 잔인해서가 아니라, 그가 가장 잘 안다고 믿었기 때문에 그런 생각은 못 했으리라. 자기의 이익이 모든 사람의 이익보다 우선해야 된다고 믿는 사람이었으니까.

 

pg. 11

 나는 내 길을 가면서도 아버지의 목적에 동원되는 기분을 맛보았다. 성격이 강한 사람들과는 그런 식이다. 그들에게서 헤엄치고 다이빙해서 멀어지면서도 여전히 그들의 물속에 있는 기분이다.

 (중략)

 내 야망은 모두 이루어졌다. 모두 나 자신의 선택으로 이루어졌다. 축복받은 삶이었다. 괜찮은 삶이었다. 그런데 이게 누구의 인생이지?

 

pg. 16

 30대인 나는 어린 자식들을 감사가 넘치고 사랑에 푹 빠진 눈길로 바라봤다. 당연히 여기 삶의 중심이 있었다. 핵심이랄까? 한 여인, 두 아이, 가정. 나는 유리한 위치에 있었다. 안전했다.

 우리는 불행이나 무시무시한 불안 따위는 모르는 사람들다운 평온과 행복을 누렸다. 남들이 감탄하는 우리 가정의 평화는 대단한 행운이어서 우리는 은밀히 자축했다. 높은 윤리적 목표가 성취되기라도 한 것 같았다. 아마도 우리는 인생이 자기에게 유리하게 펼쳐진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거기에는 지성과 결단만 요구된다는 것을 알았다. 제도, 형식, 기만이 필요했다.

 어쩌면 인생에는 양성과 악성 리듬이 있다. 우리는 아름다움의 소리에 맞추어 조율했다. 그때 내 삶은 쾌적한 풍경 같았다. 나무는 푸르고 잔디는 풍성하고 호수는 잔잔했다.

 가끔 잠든 아내를 물끄러미 보았다고, 그녀를 깨워도 할 말이 없으리란 것을 알았다. 그녀에게 무엇을 물을 수 있단 말인가? 대답은 거기, 복도 끝의 마틴이나 샐리의 방에 있는데 물을 게 뭐 있다고. 무슨 권리가 있다고 질문을 할 수 있을까?

 

pg. 35

 우리는 말없이 서 있었다. 나는 시선을 비꼈다. 그러다 다시 그녀를 보았다. 잿빛 눈이 내 눈을 똑바로 응시했다. 그 눈길에 사로잡혀 난 꼼짝하지 못했다. 한참 후에 안나가 말했다.

 "정말 이상하네요."

 "그렇네요."

 내가 대답했다.

 "이제 가봐야겠어요."

 "잘 가요."

 내가 말했다.

 그녀가 몸을 돌려 걸어갔다. 검은 옷을 입은 늘씬한 몸이 사람들 사이를 지나 사라졌다.

 나는 적막에 휩싸였다. 갑자기 퍼뜩 정신이 들기라도 한 듯 깊은 한숨이 나왔다. 알아본 데 대한 충격이 거센 물살처럼 내 몸속을 흐르고 지나갔다. 잠깐 동안 나는 같은 부류를, 나 같은 사람을 만났다. 우리는 서로 알아보았다. 그것은 고마운 일이었고 그냥 흘려보내고 싶었다.

 나는 집에 다녀왔다. 잠깐이지만 대부분의 사람보다는 긴 시간이었다. 그걸로 족했다. 내 평생을 살아가기에 충분했다.

 아니, 충분하지 않았다. 하지만 처음에는 그 순간이 있었다는 것이 고마울 뿐이었다. 외국여행 중 길을 잃었는데 문득 모국어, 어릴 때 쓰던 사투리를 들을 여행자가 된 기분이었다. 그런 사람은 그 소리의 주인공이 적인지 친구인지 따지지 않고, 그 듣기 좋은 고향의 말소리를 향해 내달린다. 내 영혼은 안나 바턴에게 내달렸다. 신과 나 사이의 사적인 일이니만큼 자유롭게 영혼이 튀어나가게 내버려둬도 될 것 같았다. 마음이나 정신, 육체, 삶이 피해를 입을까 두려워할 필요가 없을 터였다.

 거기에는 여러 인생이 실수하는 핵심적인 오해가 있다. 우리가 삶을 통제한다는 완전히 틀린 생각. 가거나 머물겠다고 고뇌 없이 스스로를 선택할 수 있다는 생각. 결국 나는 파티에서 은밀히 영혼을 잃었고 남들은 눈치채지 못했다.

 (중략)

 우리 둘 다 만났다고 말하지 않았다. 안나는 그런 만남이 있었던 내색조차 하지 않았다. 처음 몇 분간은 그녀의 분별력이 위로가 되었지만, 곧 고통의 원인으로 변해버렸다. '어떤 부류의 여자기에 이처럼 완벽하게 연기를 할까'라는 생각이 들었다. 어떻게 저렇게 능청맞을 수 있을까?

 

pg. 47

 "안나, 제발 나한테 말해줘. 당신은 누구지?"

 오랜 침묵이 흘렀다.

 "나는 당신이 욕망하는 것이에요."

 그녀가 말했다.

 "아니, 그런 말이 아니고."

 "아니라고요? 하지만 당신에게 나는 바로 그런 걸요. 다른 사람들에게 나는 또 다른 것들이죠."

 "다른 사람들? 또 다른 것들?"

 "마틴, 내 어머니, 내 아버지."

 오랫동안 말이 끊겼다가 이어졌다.

 "내 가족, 과거의 친구들, 현재의 친구들, 누구나 마찬가지예요. 당신도 그렇고요."

 (중략)

 "당신이 외동딸인가?"

 "아뇨."

 나는 기다렸다.

 "형제가 하나 있었어요. 애스턴이라고···. 로마의 우리 아파트 욕실에서 손목과 목을 그어 목숨을 끊었어요. 오해의 가능성은 없어요. 그것은 도와달라는 비명이 아니었어요. 당시에는 아무도 이유를 몰랐지요. ··· 말해줄게요. 오빠는 보답 없는 나에 대한 사랑 때문에 고통을 받았어요. 나는 내 몸으로 그를 위로하려고 노력했는데···."

 그녀가 말을 멈추었다가 이어서 똑똑 끊어 말했다.

 "그의 고통, 내 어리석음, 우리의 혼란···. 그는 목숨을 끊었어요. 이해할 만하죠. 그게 내 이야기예요. 간단히 말해서. 제발 다시는 묻지 마요. 미리 경고해두려고 당신에게 말한 거예요. 나는 상처 입었어요. 상처 입은 사람들은 위험해요. 그들은 어떻게든 살아낼 수 있다는 걸 알거든요."

 오랫동안 우리는 잠자코 있었다. 

 "왜 애스턴의 자살을 '이해할 만하다'고 말한 거지?

 "난 이해하니까요. 나는 그걸 알고 살아가죠. 이 이야기는 내가 촉각을 곤두세우고 지키는 보물단지가 아니에요. 그저 당신은 모르는 남자에 대한 이야기는 말하고 싶지 않은 것뿐이죠."

 "그게 당신을 위험하게 만드나?"

 "상처 입은 사람들은 누구나 위험해요. 살아남은 게 그들을 그렇게 만들어요."

 "어째서?"

 "왜냐하면 그들에게는 동정심이 없으니까 그 사람들은 남들도 자기들처럼 살아남을 수 있다는 걸 알거든요."

 "그런데 당신은 내게 경고했지."

 "그랬죠."

 "그건 동정 어린 행동이 아닌가?"

 "아뇨. 당신은 너무 먼 길을 가버렸으니 이제는 아무리 경고해도 소용이 없어요. 당신에게 말해두었으니 내 기분이 더 낫겠죠. 타이밍이 잘못되긴 했지만."

 "그럼 마틴은?"

 "마틴은 경고가 필요하지 않아요."

 "어째서 그렇지?"

 "마틴은 질문하지 않으니까요. 그는 내게 만족해요. 내가 비밀을 가질 수 있게 해주죠."

 

pg. 64

 정신이 온전하려면 기본적으로 좁은 시야에 매달려야 한다. 위대한 진실들은 무시하는 한편 생존에 꼭 필요한 요소들만 선택하는 능력이 있어야 한다. 그래서 개인은 일상을 살아갈 뿐 내일을 보장하지 못한다는 사실에는 관심을 두지 않는다. 각자 삶이 독특한 경험이며 무덤에서 끝나게 된다는 사실을 감춰버린다. 매 순간 자신의 인생처럼 독특한 인생들이 시작하고 끝난다는 사실을 모르는 체한다. 이런 눈가림 덕분에 삶의 패턴이 이어지고, 이 패턴에 도전하는 소수는 살아남지 못한다. 그럴 만한 이유가 있다. 각자 매일 자신의 죽음이라는 현실에 집중한다면 삶과 사회의 모든 규칙이 부적절해 보일 테니까.

 그래서 내 인생의 위대한 순간, 내 시야는 안나까지만 넓혀졌다. 그녀가 말했듯이 유례없는 눈가림 인생이었던 것이 이제 시야에서 마틴, 잉그리드, 샐리의 모습을 가차 없이 지워야 했다. 그들은 그림자로만 보였다.

 마틴의 현실이 가장 무자비하게 지워져 버렸다. 그는 캔버스 속의 인물이었고 그 위에 물감이 칠해졌다.

 

pg. 86

 "··· 완벽해요. 모두 완벽하다고요. 안나만 빼면. 그녀는 정말 이상한 여자예요. 그렇게 생각하지 않아요?"

 잉그리드가 갑자기 경계했다.

 "왜?"

 "난 조용한 사람들을 좋아해요. 지나치게 사근사근한 사람, 외향적인 성격은 참을 수가 없어요. 마틴이 한동안 만난 레베카 같은 타입 말이에요. 하지만 안나의 조용한 태도는 더 묘해요. 불길하게 느껴질 정도죠. 내 말은, 우리가 그녀에 대해 뭘 아느냐는 거죠. 일 때문에 마틴과 만났죠. 그녀는 서른세 살이고 굉장히 부유해요. 이상하기 짝이 없죠. 예를 들어 그녀는 마틴을 만나기 전의 오랜 기간 동안 뭘 했을까요?"

 "나도 모르지"

 

pg. 93

 "마틴이 당신에게 청혼할 것 같아."

 "그래요?"

 "그 아이에게는 몹시 슬픈 일이 되겠지. 하지만 그래야 이 무시무시한 상황이 해결될 수 있겠지."

 "마틴에게 뭐가 슬플 거라는 거죠?"

 대리석 같은 냉랭함, 차디찬 깊은 충격이 나를 휘감았다. 그녀의 말이 공중에서 얼어붙은 것 같았다. 꿈을 꾸는 것처럼 그녀의 말이 귀에 들렸다.

 "나는 마틴을 좋아해요. 우리는 함께 아주 행복한 시간을 보내죠. 나는 그와 진짜 인생을 일굴 수 있어요. '좋다'고 말하게 될 것 같네요. 마틴은 워낙 영리하니, 받아들여질 가능성 없이 여기까지 오지 않았을 거예요."

 우리가 입 밖에 낼 줄은 꿈도 꾸지 않은 말이었다.

 "마틴이랑 결혼할까 고민 중이란 건가?"

 "고민 중이에요. 그래요."

 "내 아들이랑 결혼을 하겠다고?"

 그런 대답을 들을 줄은 꿈에도 몰랐다.

 "그럴걸요. 처음에 당신에게 경고했어요. 조심하라고 말씀드렸지요."

 "상처 입은 사람들은 위험하다. 그들은 이기고 살아날 수 있다는 것을 안다."

 "맞아요. 기억하시네요. 당신은 내게서 원하는 것을 영원히 가질 수 있어요. 나는 당신이 원하는 것을 원해요. 우리는 평생토록 함께할 수 있어요. 인생을 그런 식으로 조정할 수 있다고요. 내가 마틴이랑 결혼한다면 얼마나 수월하게 그렇게 될지 생각해보세요. 우리는 늘 서로 볼 수 있어요. 나는 아이비가 나무를 휘감듯 당신에게 나 자신을 휘감을 수 있어요. 난 당신이 내 지배자라는 걸 알아봤어요. 당신을 본 순간 복종했죠."

 그녀는 방 안을 거닐면서 노래하듯 말을 읊조렸다.

 "하지만 난 마틴도 원해요. 그의 삶을 함께하고 싶어요. 그는 내게는 '정상'이에요. 우리는 함께 시작하는 여느 젊은 커플들과 똑같을 거예요. 그게 옳고, 그게 정상이죠."

 안나는 '정상'이란 말을 마치 축복 기도라도 되는 듯이 발음했다.

 

pg. 126

 "젊은 여자를 뚫어지게 쳐다보면서 손에 든 와인 잔을 부수는 남자라면 표면적인 상처 이상의 고통에 시달리는 법이지요. 그대로 조용히 있으십시오. 친구, 조용히 있도록 해요."

 화강암, 불빛, 사람들 무리를 지나쳤다. 조용히 있기에는 너무 늦어버렸다. 너무 늦었다.

 "안나는 여러 사람에게 엄청난 아픔을 남겨주었지요. 제 견해로 그 애는 전혀 잘못이 없습니다. 하지만 안나가 재앙의 촉매제이기는 합니다. 마틴은 다를지 모르겠군요. 그는 안나를 내버려두는 것 같아요. 안나에게는 그게 아주 중요합니다. 누군가 제지하려고 들면 안나는 싸울 겁니다. 누구도 안나를 부술 수 없어요. 그 애는 이미 부서졌거든요. 안나는 자유로워야 합니다. 그러면 언제나 집으로 돌아올 겁니다. 물론 이건 신랑감에게 줄 충고지요, 그 아버지가 아니라. 하지만 마틴에게는 이런 조언이 불필요할 것 같아요. 그러니 친구여, 제 말에 주의하십시오. 당신을 구제할 수 있는 유일한 조언이 너무 늦은 듯합니다만, 안나에게서 떨어져 있으십시오."

 "이 호텔이시지요."

 내가 차를 세웠다.

 "감사합니다. 나는 입이 무겁답니다. 상상할 수 없을 만큼 많은 비밀을 안고 사는 사람이거든요. 틀림없이 우린 다시 만나겠죠. 그때 내 태도를 보면 우리가 이런 대화를 했는지가 의심스러울 겁니다. 잘 가세요, 행운을 빕니다."

 그리고 그는 가버렸다. 

 나는 거울에 얼굴을 힐끗 비추었다. 문득 내 신중한 옛 생활이 떠올랐다. 선량함에 대한 대가를 치르나? 잘 살아온 삶에 대한 대가인가? 감정 없는 선량함에 대한 대가인가? 자식들을 원치 않은 대가일까? 간절하지 않은 커리어에 대한 대가인가? 죄의 대가였다. 죄. 내가 평생 한 번이라도 죄를 지을 용기가 있었나?

 거울에 비친 얼굴은 내게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아까 윌버에게 모든 말을 한 얼굴인데.

 

pg. 132

 "왜 이렇게 심문을 해야 당신에게 진실 비슷한 것이라도 얻어낼 수 있는 거지?"

 "난 사람들이 대답을 들을 준비가 되어야 질문을 한다는 것을 알거든요. 그 전에는 흔히 진실을 추측하거나 느끼죠. 하지만 확실히 알지는 못해요. 사람들은 알고 싶으면 물어봐요. 어느 쪽이든 위험해요."

 "위험하다. 어째서?"

 "왜냐하면 난 질문받는 것을 싫어하니까요. 한편 난 거짓말하지 않으려 애써요. 오늘 밤 당신은 내게 왔어요. 나는 거기 있었고, 어떻게 해서든 늘 거기 있을 거예요. 그 외에 뭐가 중요하죠? 당신이 묻고 싶은 모든 질문에 내가 대답한대도 당신이 얻는 게 뭐죠? 우리에게는 우리의 이야기가 있어요. 그걸 그냥 내버려둬요. 내 인생의 다른 사람들을 내버려둬요. 내가 당신ㅇ게 그러듯이. 난 당신에게 잉그리드에 대해 묻지 않아요. 혹은 다른 여자들에 대해서도···. 지금까지 딴 여자들도 있었나요?"

 나는 고개를 저었다.

 (중략)

 

pg. 153

 샐리가 말했다.

 "마틴과 나는 아주 운이 좋았죠. 런던에서 안정된 생활을 해왔어요. 히틀리에서 휴가도 많이 보냈고."

 마틴이 맞장구쳤다.

 "매년 여름이면 이탈리아의 작은 마을에 갔지. 반복적인 의식은 영혼에 위로가 될 수도 있어요. 샐리와 동감이에요. 우린 좋은 어린 시절을 보냈어요. 여러 면에서."

 "모든 면에서가 아니고?"

 잉그리드가 농담을 던지고 웃었다.

 "배은망덕한 자식은 부모가 잘못한 일을 적은 목록이 긴 법이거든요. 제 건 아주 짧아요."

 에드워드가 끼어들었다.

 "이것 봐라, 네가 모두를 매료시키는구나. 그래 목록에 뭐가 있지? 네 부모가 은밀히 때리기라도 했니?"

 에드워드가 재미있어서 손을 비볐다.

 "지나치게 질서정연했어요. 혼돈과 열정이 부족했죠."

 마치 입술만 달싹대는 것처럼 마틴의 얼굴에 변화가 없었다. 담담한 말투였다. 사람들이 내면의 고통을 드러내는 가장 흔한 방식이다. 꾹꾹 누르려고 애쓰다 보면 말의 색깔과 얼굴 표정이 없어진다.

 우리는 식탁 양쪽 끝에서 서로를 쳐다보았다. 아들을 알지 못하고 산 아버지. 아버지를 안다고 생각하는 아들.

 

pg. 187

 안나와 어머니 엘리자베스가 우리 응접실 소파에 나란히 앉았다. 안나는 평소처럼 조용하고 침착했다. 어머니는 체구가 작아서 한 마리 새 같았다. 안나가 물려받은 검은 눈과 머리는 다른 모든 부분과 당혹스럽게 대조적이었다.

 활기차게 훈련된 태도에서 피로감이 느껴졌다. 억지로 환한 미소를 짓고 지나치게 빠르고 다정하게 대답하는 습관 때문에 그렇게 보이는 듯했다.

 

pg. 233

 잉그리드는 등받이 의자에 꼿꼿이 앉아 있었다. 그녀의 발이 카펫에 박히기라도 한 듯 어색해 보였다. 그녀의 등은 의자의 등받이에 달라붙어 있었다. 처진 곳이라곤 없는 몸이었다. 근육이 조금이라도 흐물흐물해지면 몸의 윤곽선이 완전히 무너지기라도 할 것 같았다. 부기가 가셔서 다시 곱고 창백해진 얼굴이 목 끝에 어색하게 붙어 있었다.

 몸을 가누고 표정을 관리하면서 생존으로의 길에서 내딛는 첫 발자국. 외면이라는 철창에 갇힌 슬프은 그래도 갇힌 슬픔이다. 미친 듯이 근육과 뼈를 찢어도 달아날 수가 없는 슬픔은 느릿느릿 깊어지는 상처를 감염시킨다. 무덤까지 안고 갈 내적인 상처는 검시를 해도 드러날 수가 없다. 슬픔은 천천히 지쳐서 잠들지만, 결코 죽지 않는다. 시간이 흐르면 감옥에 익숙해지고, 죄수와 간수 사이에는 존중하는 관계가 발전된다. 난 이제 그것을 안다. 겨우 이제야. 잉그리드는 내게 마틴을 낳아주었다. 그리고 마지막 밤 나는 그의 죽음을 끌어안았고, 그녀에게서 그것을 낚아챘다. 나는 그것을 소중히 여길 것이다. 또 잉그리드는 분노와 화에서, 죄 없는 이의 죄책감에서 해방되었다. 이제 그녀의 싸움 상대는 슬픔이었다. 또 마침내 슬픔이 승리한다 해도 그녀는 인생을 갖게 될 터였다. 그것은 그럴듯한 성취다. 

 

pg. 252

  나 자신을 당신에게서 떼어내야 해요. 나는 치명적인 선물이었어요. 난 당신이 그렇게 열심히 찾았던, 쾌락이라는 가장 큰 보답을 주는 고통스러운 선물이었어요, 우리는 격렬한 한 쌍이 되어, 우리가 누구며 누구였든 자유롭게 솟구쳤어요. 지구에 온 외계인들처럼 우리는 서로를 발견했고, 발걸음마다 우리가 잃은 별나라의 언어를 새겼어요. 우리에게는 고통이 필요했어요. 당신이 갈구한 것은 내 고통이었어요. 당신은 믿지 않겠지만, 당신의 허기는 충분히 채워졌어요. 이제 당신은 나름의 고통을 갖고 있다는 것을 명심하세요. 그것이 '모든 것, 언제나'가 될 거예요. 당신이 나를 찾아다닌다 해도 난 거기 없을 거예요. 당신이 이미 갖고 있는 것을 찾아다니지 마세요. 우리에게 주어졌고 이제는 영원히 가버린 나날 역시 '모든 것, 언제나'예요.

 - 안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