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nspiration

몇 페이지 5

iamsera 2017. 7. 17. 20:20

 

좋아해. 가둬진 곳에서 외쳤다. 어쩌면 가둬진 곳이라 외친거지. 초라한 나와 나의 것들만 있는 방이라서, 그러니까 소리 하나 쉽게 새어나가지 않는 곳이라서. 나는 어디서 전철을 타더라도 맨 끝에서 세 번째의 출입문만을 골라서 타는 사람, 딱 그만큼 약은 사람이라서. 그러니까 감정의 맨 끝까지 걸어가는 사람이 아니었기 때문에 나는. 어떤 날이었어. 세 번째 출입문의 주변으로 기분 좋은 노을이 들어오고 있었지. 오른쪽 끝 좌석에 앉아 음악을 듣고 있었어. 끝 좌석은 아무렇게나 기댈 수 있어서 좋아, 뭐 그런 생각을 하면서. 나와는 어울리지 않는 달콤한 음악을 듣고 있었어. 그리고 문득 그 눈동자를 떠올린 거지. 내 것과는 태생부터 다른 것 같은 달콤하고 불면의 주인이고 온통 하얗고 검고 투명한 네 눈동자. 그렇게 나와는 어울리지 않는 네 화려한 눈을 떠올렸어, 어울리지 않게 달콤한 음악을 듣다가 말이야. 열차 구석에는 훈련을 마친 것 같은 고교 야구선수가 서 있었어. 피부가 까맸고 눈 밑의 아이 패치는 더욱 새까맸어. 마스카라를 떠올렸어. 눈물이 번지면 꼭 저런 모양으로 뭉개지는 마스카라를 말이야. 모르겠어, 내 마음이 그걸 떠올렸어. 만약 개개인에게 할당된 울음의 총량 같은 게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아이 패치든 마스카라든 다 지워버릴 정도로 바짝 미리 울어버리면. 그래서 내 눈도 온통 너의 것처럼 투명해지면, 그땐 우리도 사랑일까. 그땐 끝 좌석의 철봉 대신 네게 기대고 있을까. 모르겠어, 내 마음이 그런 것들을 꿈꿨어.

초라한 방에는 초라한 사람이 있지. 내일쯤에는 호기롭게 말해볼까, 우리, 앞으로는 여름과 겨울에만 만나자고 말이야. 그래도 괜찮겠다고 말이야. 또 그다음 날엔 괜히 시비를 걸어볼까, 너는 머릿결이 왜 이렇게 많이 상했냐며. 테이블에 힘없이 떨어진 것 좀 보라고 말이야. 초라한 방에는 초라한 마음이 있지. 기후변화가 더 격해지길 바라는 투명치 못한 마음이, 봄과 가을이 서서히 사라지고 온통 여름과 겨울뿐이길 바라는 마음이. 힘을 잃고 떨어진 머리카락을 몰래 훔쳐온 마음이, 네 머리카락을 나만의 사랑스러운 뱀처럼 사육하는 마음이. 골목 끝 세 번째 집에서, 가둬진 곳에서, 좋아해. 초라해. 좋아해.

 

_ 오휘명 2017.05.05 

 

 

꺼지지 않는 단어를 갖고 싶어

괜찮은 생활을 찾고 싶어 가방이 가방에 들어가듯 사는 일 위해 사는 일 열렸다 닫히는 건 습관인가요 습관의 비용은 얼마인가요 사용되고 싶어 활용하기 좋은 마음을 갖고 싶어 마음이란 건 멀리 있을 땐 늘 넉넉한데

 

_ 이훤

 

 

가령 이런 식, 비가 내리거나 시럽을 듬뿍 넣은 카페라떼를 마시거나 비가 내리거나 외롭지 않기 위해 동물원에 가거나 비가 내리거나 흔들리며 흔들리며 비가 내리거나 가령 이런 식

 

_ 여성민, 무엇이 오는 방식

 

 

지난 수요일 아침에 한 한국 남자가 전화를 걸어왔지요. 누구냐고 물었을 때, 혜도라고 대답했어요. 난 심장이 멈추는 듯 숨을 쉴 수 없었지요. 나의 긴 침묵으로 인해 당신은 내가 그 이름을 완전히 망각한 줄로 오해했어요. 하지만, 내가 어떻게 대답했겠어요? 20여 년 전으로부터 아득히 떠오를는 이름과 음성, 아직 소년이었던 스무 살의 당신.. 20여년 전 한국을 떠난 뒤로 난 당신에게 답장도 않고, 전화도 받지도 않고, 무섭도록 매정하게 소식을 끊었지요. 그게 당신에게 더 나을 거라고 생각했었어요. 그런데, 죽음같이 긴 시간을 지나 당신 음성이 나를 불렀어요. 수니. 내가 대답하자 당신은 세 번이나 연거푸 내 이름을 불렀지요. 난 마취와 같이 깊은 잠에서 깨어나는 느낌이었어요.

오늘 난 망설이고 망설이다가 편지를 씁니다. 위스키를 두 잔 마시고 이 편지를 써요. 미국으로 막상 떠나게 되었을 때 - 너무 괴로워서 매일매일 애꿎은 당신에게 화풀이를 했지요. 이유도 모르고 마냥 나를 좋아만 했던 어린 당신에게요. 내가 떠나던 날 공항까지 따라와 우리 엄마 곁에서 자꾸만 울며 가지 말라고 조르던 당신 모습을 어떻게 잊겠어요? 당신은 중간 키에 피부가 몹시 희고 사랑스러운 모습이었지요. 당신은 내가 철들 무렵 처음으로 사랑한 남자예요. 우린 3년 가까이를 함께 했어요. 함께 영화를 보았고 독서실에 다녔고 친구들과 어울렸고 빵집과 분식집을 다녔고 양쪽 집을 오갔고 함께 대입 시험공부를 해 같은 학교에 들어갔고 같은 버스를 타고 다녔고 캠퍼스에서도 늘 함께 했죠. 하지만 그것은 아직 사랑은 아니었어요.

이런 말을 전할 아무런 이유도 없지만, 당신이 20여 년 만에 전화를 했고, 나로 인해 겪었을 고통을 위로하기 위해 내 비밀을 털어놓을게요. 내가 당신을 정말로 사랑하게 된 건, 이 곳에 온지 2년이 지났을 때였어요. 한국에서의 인면이 모두 지워져 갈 무렵이었지요. 부모와 형제와 친척과 친구들.. 그런데 이상한 일이 일어났어요. 하고 많은 사람들 중에서 그토록 매정하게 소식을 끊은 혜도 씨를 나는 그때부터 다시 사랑하기 시작했어요. 우리의 시간들이 되살아나기 시작한 거예요. 우리가 함께하는 동안 당신은 순수했고 말할 수 없이 관대했고 부드러웠죠. 당신은 나로 인해 너무 아파했고, 울며불며 나를 끝까지 붙잡았어요. 난 일기장을 새로 사서 당신 이름을 향해 매일 매일을 기록했죠. 2년쯤 그렇게 했어요. 내 마음이 깊은 곳에 편안하게 가라앉을 때까지요. 아마 이 글을 읽으며 당신도 지금 놀랄 거예요. 그렇게 세월이 흘러간 거예요. 내가 향수병으로 겨우 6개월 만에 되돌아갔을 때, 만약 혜도 씨가 그 마담과 동거하지 않았더라면, 그때 난 미국으로 돌아가지 않았을 거예요. 돌아왔다 해도, 2년 뒤에 결국 혜도 씨에게 되돌아갔을 거예요. 하지만, 혜도 씨는 이미 달라져 있었잖아요.

지난 20여 년 동안 하루도 나를 잊은 적이 없다는 말은 솔직히 믿어지지 않아요. 이 세상에 정말 그런 감정이 존재할까요? 무슨 이유에선지, 당신은 갑자기 전화를 걸었어요. 그곳 시간 새벽 두시, 술을 많이 마셨더군요. 난 당신이 감정을 과장하거나, 착각한다고 생각해요. 살다보면 울컥 치솟는 그런 날도 있겠지요. 지금은 올해의 마지막 날이에요. 당신이 어떤 모습으로 사는 지는 짐작할 수 없지만 가족과 화목하고 건강하고 밝게 사시기를 빌어요. 그리고 나 혼자 사랑했던 2년을 고백했으니, 위안이 되기를 바랍니다.

혜도 씨에게 신의 축복을!

 

_ 전경린, 언젠가 내가 돌아오면

 

 

내 청춘이 지나가네

말라붙은 물고기랑 염전 가득 쏟아지는 햇살들

그렁그렁 바람을 타고 마을의 소금 사막을 지나

당나귀 안장 위에 한 점 가득 연애편지만을 싣고

내 청춘이 지나가네, 손 흔들면 닿을 듯한

애틋한 기억들을 옛 마을처럼 스쳐지나며

아무렇게나 흙먼지를 일으키는 부주의한 발굽처럼 

무너진 토담에 히이힝 짧은 울음만을 던져둔 채

내 청춘이 지나가네, 하늘엔

바람에 펄럭이며 빛나는 빨래들

하얗게 빛바랜 마음들이 처음처럼 가득한데

세월의 작은 도랑을 건너 첨벙첨벙

철 지난 마른 풀들과 함께 철없이

내 청춘이 지나가네, 다시 한 번 부르면

뒤돌아볼 듯 뒤돌아볼 듯 기우뚱거리며

저 멀리,

내 청춘이 가고 있네

 

_ 박정대, 내 청춘이 지나가네

 

 

서가를 보면 자신이 무엇으로 이루어져 있는지가 보인다

 

_ 다치바나 다카시, 다치바나 다카시의 서재

 

 

나는 타인에게 별생각 없이 건넨 말이 내가 그들에게 남긴 유언이 될 수 있다고 믿는다. 그래서 같은 말이라도 조금 따뜻하고 예쁘게 하려 노력하는 편이다. 말은 사람의 입에서 태어났다가 사람의 귀에서 죽는다. 하지만 어떤 말들은 죽지 않고 사람의 마음속으로 들어가 살아남는다.

 

_ 박준, 운다고 달라지는 일은 아무것도 없겠지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