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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도 - 허수경

iamsera 2017. 9. 5. 23:51


포도


- 허수경




너를 잊는 꿈을 꾼 날은

새벽에 꼭 잠을 깬다


어떤 틈이 밤과 새벽 사이에 있다


오늘은 무엇일까


저 열매들의 얼굴에 어린 빛이

너무 짧다, 싶을 만큼 지독한 날이다


너를 잊다가 안는 꿈을 꾼다

그 새벽에 깬다


잎의 손금을 부시도록 비추던 빛이

공중에서 짐짓 길을 잃는 척 할때


열매들이 올 거다

네가 잊힌 빛을 물고 먼 처음처럼 올 거다


그래서 깬다

너를 잊고 세계가 다 저물어버린 꿈여관,


여기는 포도가 익어가는

밤과 새벽의 틈새






출처: 허수경, 누구도 기억하지 않는 역에서, 문학과지성시인선490, 2016


누구도 기억하지 않는 역에서
허수경(시인) 저 | 문학과지성사 | 2016.09.28
별점
8 | 네티즌리뷰 39건 |   8,000원 → 7,200원(-10%)
소개  우리말의 유장한 리듬에 대한 탁월한 감각, 시간의 지층을 탐사하는 고고학적 상상력, 물기 어린 마음이 빚은 비옥한 여성성의 언어로 우리 내면 깊숙한 곳의 허기와 슬픔을 노래해온 시인 허수경이 여섯번째 시집 『누구도 기억하지 않는 역에서』를 출간했다. 2011년에 나온 『빌어먹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