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nspiration

몇 페이지 6

iamsera 2017. 12. 29. 16:47


언젠가 우리가 우연히 극장 매표소에서 마주쳤을 때, 그리고 다른 어느 날 당신의 어깨너머로 휴대폰 화면을 함께 구경했을 때, 그때쯤부터 나는 몰래 마음을 품기 시작했습니다. 하지만 그 마음은 말 그대로 '몰래'여서, 생각하기만 해도 빨개지는 볼은 아직도 어쩔 수 없는 것 같습니다. 십이월 십이일 오늘은 체감온도가 영하 이십 도라는데, 나는 그게 하나도 겁나지 않을 정도입니다. 이렇게 후끈거리는걸요. 당신의 사진들, 아니, 엄밀히 말하자면 사진처럼 각인된 얼굴들이 연속적으로 스쳐 영상을 이룹니다. 그리고 나는 사춘기 소년처럼 그 장면들을 되감습니다. 영상의 마음, 따뜻한 마음을 품습니다. 내 카메라의 씬 안으로 들어와 주세요. 당신이 주인공이라면, 조악한 화면의 지직거리는 노이즈도 예쁜 눈송이처럼 보일 겁니다.


_오휘명, 영상




그대가 싫습니다. 나는 반짝이며 서서히 가라앉고 있는 창가의 먼지들을 봅니다. 하지만 동시에 좋은걸요. 아니, 그대가 싫어요. 먼 하늘에 비행운이 그려집니다. 그러나 그대가 좋습니다. 당신 참 별로예요. 육교의 노약자용 엘리베이터가 오르내리는 것이 보이네요. 그렇지만 역시 당신이 좋아요. 아, 모르겠어요. 아무래도 좋아요. 우주의 수많은 상승과 하강을 보며 나도 함께 오르내립니다. 도망치듯 튀어오르며 싫다고 떼쓰다, 중력 같은 끌림에 매번 항복하는 겁니다. 좋다고, 아무래도 좋다고요. 만유인력 법칙에 따르면 먼 나라의 누군가와 나 사이에도 인력이 작용하고 있다는데, 심지어 그대는 또 그대입니다. 마음이 오르내리는 진폭은 점점 커져서 요즘에는 빈혈을 느끼기도 합니다. 어떤 날엔 어느 동네의 공기가 유독 그리워, 구두를 질질 끌며 집을 향해 억지로 걸었습니다. 당신은 그 끌림입니다. 어떤 날엔 나의 취향은 아니지만, 누군가에겐 잘 어울릴 것 같은 소품을 두 개 사기도 했습니다. 당신이 그 끌림의 주인이었습니다.


_오휘명, 당신이 끌림의 주인이었습니다




안녕 당신, 우리가 못 본 지도 한참 됐군요 난 지금 편백나무 울울한 숲에 와 있어요 편지를 받고 아직도 내가 그립거든 답장은 하지마세요 나는 다만 욕망을 연기하는 신경증 환자처럼 기다릴 뿐 이에요 이 곳 나무들은 팔을 치켜들거나 앞으로 뻗은 채로 배고픈 향기를 뿜어요 배가 고플수록 당신이 그리워요 당신은 입을 크게 벌린 나무사이로 포도주처럼 흘러내려요 새벽이면 늙고 주름진 슬픔이 부드러운 흙속에서 불쑥 솟아올라 나는 나무보다 더 새파랗게 기절하곤 해요 이곳에선 당신을 사티로스라고 부른 답니다 사랑의 수정주의라 해두죠 한 집 건너마다 유령처럼 텅 빈 뉘앙스가 당신을 덮쳐요 팔을 늘어뜨리고 잠든 나무 위로 내 몸을 덮칠 수 있을까요 잠을 잃은 건 백년도 지났어요 피톤치드는 불면증 치료에 효과가 좋은 듯해요 봉투에 봉함해서 보낼게요 사티로스 이만 안녕, 당신을 사랑해요 나도 라는 부족한 말로 답장은 하지마세요 나는 다만 끝없이 사라질 뿐 이에요


_한미영, 편백나무 숲에서 보낸 편지




너는 내 귀에다 대고 거짓말 좀 잘해주실래요 너무나 진짜 같은 완벽한 거짓말이 그립습니다 아이들이 아이스크림을 찾듯 거짓말 덕분에 이 우주는 겨우 응석을 멈춥니다 어지럽습니다 체한 걸까요 손을 넣어 토하려다 손을 들고 질문을 합니다 여긴 왜 이렇게 추운가요

너는 여기로 올 때에 좀 조심해서 와주실래요 뒤를 밟는 별들과 오다 만난 유성우들은 제발 좀 따돌리고 너 혼자 유령처럼 와주실래요 내 몸은 너무 오래 개기월식을 살아온 지구 뒤편의 달, 싸늘하게 식었을 뿐 새가 가지를 털고 날아만 가도 요란을 떠는, 풍화도 침식도 없는 그늘입니다 뜨거운 속엣것이 고스란히 보존된 광대한 고요란 말입니다 춥습니다


_김소연, 한 개의 여름을 위하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