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nspiration

데미안

iamsera 2016. 3. 9. 20:42


pg. 11

가장 신기한 일은 이 두 개의 세계가 서로 경계를 접하고 있으며, 그것이 아주 가까이에 겹쳐 있다는 것이다. 이를테면 우리 집 하녀 리나는 저녁 때 기도 시간에 문간 옆방에 앉아, 씻은 두 손을 매끈하게 다린 앞치마 위에 놓고 맑은 목소리로 노래를 같이 부른다. 그때의 그녀는 완전히 아버지와 어머니가 계시는 우리들의 밝고 옳은 세계에 속해 있었다. 그런 후 곧 나에게 부엌이나 마구간에서 머리없는 사나이에 관한 이야기를 할 때면, 또는 푸줏간 옆의 작은 가게에서 이웃 여인네와 싸움을 할 때면, 그녀는 딴 사람이 되고, 다른 세계에 속하며 비밀에 휩싸이게 된다. 모든 것이 그러했으며 나 자신이 가장 그러했다. 확실히 나는 밝고 옳은 세계에 속해 있었고, 내 양친의 어린애였다. 그러나 내가 눈과 귀를 향하는 곳은 어디에나 거기에는 다른 세계가 존재했다. 때로 그것은 나에게 낯설고 기분 나빴다. 사람들은 거기서 어김없이 양심의 가책과 불안을 얻었지만 나 역시 이 다른 세계 속에서도 살고 있었다. 때때로 나는 이 금지된 세계 속에 사는 것을 아주 좋아하기까지 했다. 그리고 가끔 밝은 곳으로 돌아오는 것이 - 그것은 그토록 필요하고 좋은 일인지 모른다 - 어쩐지 좀더 아름답지 못한, 권태로운, 그리고 황량한 곳으로 돌아오는 것 같았다. 물론 나의 인생 목표는 나의 아버지나 어머니처럼 그렇게 밝고 뛰어나고 정돈되는 데 있다는 것을 알았으나, 거기까지 이르려면 학교에 다니고 공부하고 시험을 치러야 했다. 그리고 그 길은 항상 다른 어두운 세계의 옆을 지나, 그 어두운 세계를 통하여 가야만 하기 때문에 사람들은 흔히 그 세계에 머무른 채 가라앉는 수도 있었다. 이것을 경험한 탕아들의 이야기가 있는데 나는 열심히 그것을 읽었다. 그런 이야기에서는 언제나 아버지와 선(善)으로 돌아가는 것이 구원을 받는 것이고 훌륭한 것이라고 되어 있어서, 이것만이 올바른 것, 선한 것, 그리고 바랄 만한 가치가 있는 것이라고 나도 마음 속속들이 느껴졌다. 그러나 이야기 가운데서도 약한 자와 탕아들 사이에서 전개되는 부분이 더욱더 흥미로웠다. 솔직히 말하자면 탕아가 속죄하고 다시금 구원을 받는다는 것은 가끔 정말로 유감된 일이라고 생각되기조차했다. 그러나 그런 것을 사람들은 말하지도 않았고, 생각조차도 하지 않았다. 그것은 하나의 예감과 가능성으로서 감정의 아주 밑바닥에 막연하게 존재해 있었다. 내가 악마를 상상해볼 때면 변장했건, 정체를 드러내고 있건, 나는 그놈을 상가나 시장이나 또는 음식점에나 있는 것으로 생각할 수 있지만 우리 집에 있다고는 절대로 생각하지 않았다.


pg. 30

처음부터 그가 내 마음에 든 것은 아니었다. 오히려 그 반대로 나는 그에게 무슨 반감 같은 감정을 가졌었다. 그는 나보다 우월했고 냉정했으며 그의 거동은 약이 오를 정도로 확고했다. 그의 눈은 어른스러운 표정을 지었는데 - 그런 표정을 아이들은 좋아하지 않았다 - 그 가운데는 얼마간 슬픈 듯하면서도 장난기가 깃들어 있었다. 그렇지만 나는 줄곧 그를 쳐다봤는데 그는 나를 좋아하는 것 같기도 하고 싫어하는 것 같기도 했다. 그가 학생으로서 그 당시 어떻게 보였나를 오늘날 생각해볼 때 나는 이렇게 말할 수 있다. 그는 모든 점에 있어서 다른 애들과 달리 아주 특이했고 개성적으로 여겨졌으며, 그것 때문에 눈에 띄었다. 동시에 그는 남의 눈에 어울리려고 애쓰는 변장한 왕자처럼 옷을 입었고 행동했다. 


pg. 62

그는 갑자기 너무 많이 이야기한 것을 후회하는 듯 말을 멈췄다. 그 당시 나는 이미 그가 무엇을 느끼고 있는가 하는 것을 눈치로써 어느 정도 파악할 수 있었다. 즉 그는 자기의 생각을 기분좋게, 그리고 겉보기에는 피상적으로 말하곤 하지만, 언젠가 그가 말한 대로 '단지 말하기 위한 이야기'는 한사코 싫어했다. 그러나 내가 진정한 흥미 이외에 다분히 장난기와 재담의 기쁨, 혹은 그 밖의 무엇을 너무 많이 가지고 있다는 것을, 요컨대 완전한 진지성이 결여되어 있다는 것을 그는 느꼈던 것이다.


pg. 67

견진성사 뒤의 방학 동안 처음으로 느껴본 잇아한 공허와 고독은(이 공허와 이 희박한 공기를 후에 나는 얼마나 맛보게 되었던가?) 그렇게 빨리 지나가지는 않았다. 고향을 이별하는 거은 아주 쉬웠다. 나는 사실 내가 가슴 아프지 않은 것을 자랑스러워했다. 누나들은 이유없이 울었다. 나는 그렇게 할 수 없었다. 나는 나 자신에 대해서 놀랐다. 항상 나는 감정이 풍부한 어린애였고 근본에 있어 아주 선량한 아이였다. 지금 나는 아주 변했다. 나는 외부 세계에 대해 전혀 무관심한 태도를 취하고 온종일 나의 내부에 귀를 기울이고 내 마음속 깊이 흐르는 금지된 어두운 강물 소리를 듣는 데만 몰두했다. 이 반 년 동안에 나는 갑자기 성장했으며 키는 크고 야위었다. 몸은 아직 성숙하지 않았으나 세상을 보는 눈은 달라졌다. 소년의 상냥함도 나에게서 사라졌다. 나는 사람들이 나를 사랑할 수 없으리라는 것을 느꼈다. 나 자신도 나를 결코 사랑하지 않았다. 막스 데미안에 대해서 나는 때때로 말할 수 없는 그리움을 가졌다. 그러나 나는 또한 그를 싫어했고 정신적으로 메말라가는 내 생활의 책임을 그에게 돌렸다,


pg. 71

나는 고향과 양친의 집을 아버지와 어머니를 누나와 정원을 보았다. 고요하고 고향 냄새가 나는 나의 침대를 보았고, 학교와 시장을 보았고, 데미안과 견진성사 수업을 보았다. - 이 모든 것은 밝았고, 광채에 둘러싸여 있었고 놀라웠고 신성했고 깨끗했다. 그리고 이 모든 것은 - 지금에서야 내가 그렇다는 걸 알지만 - 어제까지도 아니 몇시간 전까지도 나에게 속해 있었으며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런데 바로 지금 이 시각 그것들은 가라앉았고 저주받았으며 더 이상 나에게 속해 있지 않으며, 나를 추방했고 더러운 듯이 나를 바라보고 있다!  (중략) 나는 나 자신을 한심하게 보지 않을 수 없었다. 떠돌아다녔고, 세상을 경멸한 나! 오만한 정신으로 데미안의 생각에 공명했던 나! 내던져지고 음탕하며, 무서운 충동의 습격을 받아 술취했고, 더럽고 메스껍고, 속되고 방종한 놈으로밖에는 보이지 않았다. 모든 것이 순수하고 광채와 사랑스런 부드러움이 가득 찬 정원 속에 붇혀 있던 나, 바흐의 음악과 아름다운 시를 사랑했던 내가 이 꼴이 된 것이다. 나는 메스껍고 분노에 넘쳐 자신의 조소를 듣는다. 술에 취했고 자제할 수 없고, 경련적으로 어리석게 터져나오는 웃음소리를······. 이것이 나의 전부였다.

그러나 이런 감정에도 불구하고, 이처럼 고통받는 것이 내게는 또한 쾌락이 되기도 했다. 너무 오래 나는 맹목적으로 무감각하게 기어다녔고, 너무 오랫동안 내 마음은 침묵하여 초라하게 한쪽 구석에 도사리고 있었기 때문에, 내 마음은 이와 같은 자기 탄식과 공포와 무서운 감정에까지도 환영의 손을 들었던 것이다. 그렇지만 그런 속에서도 감정은 있엇고, 불꽃도 타올랐고, 심장은 움직였다! 비참한 가운데서 나는 어수선하게 자유의 봄과 같은 무엇을 느꼈다. (중략)

나는 다시 한 번 어두운 세계에, 그리고 악마의 패거리에 속하게 되었다. 그리고 나는 그 세계에선 멋들어진 놈으로 통했다. 동시에 내 마음은 비참한 감정으로 가득 찼다. 나는 자기를 파괴하는 방탕 속에서 살아가고 있었기 때문이다. 패거리들은 인솔자이며 굉자한 놈이며, 대단히 과단성 있고 기지 있는 놈이라고 일컬어지는 반면, 내 가슴속 깊은 곳에는 근신에 가득 차 불안한 마음이 나부끼고 있었다. (중략) 술집의 더러운 식탁을 끼고 앉아 거품이 너미는 맥주를 마시면서 대단한 독설로 친구들을 즐겁게 하고 때때로 놀라게 하며 지냈으나, 남모르는 나의 가슴속에서는 거꾸로 내가 조소했던 모든 것을 존경해오고 있었다. 마음 속으로는 울면서 나의 영혼 앞에서, 나의 과거 앞에서, 어머니와 하느님 앞에서 무릎을 꿇고 앉았다.

내가 결코 다른 친구들과 일체가 되지 않았다는것, 내가 그들 사이에서 고독했고, 그래서 이렇게 괴로워하게 된 것에는 충분한 근거가 있었다. 가장 무모한 자들의 생각에 따르면 나는 술집의 영웅이요, 독설가였다. 나는 선생님과 학교, 양친과 교회에 대한 생각과 이야기는 슬기와 용기를 보여주었다 - 나는 음담패설에도 끄떡않았고 때로는 나 자신이 그런 이야기를 하는 수도 있었다. 그러나 내 친구들이 여자에게 갈 때엔 절대로 함께 가지 않았다. 나는 고독했고 사랑에 대해 불붙는 동경과 절망적인 동경에 차 있었다. 반면 내 이야기만으로 따져보면 나는 냉담한 향락자라야만 될 것이다. 나보다 더 상처받기 쉽고 수줍어한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pg. 86

나는 지금도 역시 좋은 학생은 아니다. 그러나 이제는 어떤 사람도 내가 반 년 전처럼 아마 거의 확정적으로 학교에서 퇴학당할 것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은 없었다. 아버지는 다시 예전과 같은 어조의 비난이나 위협이 없이 편지를 써보냈다. 그러나 나는 아버지나 또는 누구에게도 내 내부의 변화가 어떻게 일어났는지르리 설명하고 싶은 욕망은 없었다. 이 변화가 나의 양친과 어떻게 일어났는지를 설명하고 싶은 욕망은 없었다. 이 변화가 나의 양친과 선생들의 소망과 일치한 것은 다만 우연에 불과했다. 이 변화로 내가 다른 사람과 어울리게 되었다거나 그 누구에게도 가가이 가게 한 것은 아니었다. 오히려 나를 보다 더 고독하게 해줬다. 그것은 어딘지 모를 곳에, 데메안에게, 먼 운명에게 향하고 있었다. 나 자신도 그것을 알 수 없었다. 나는 그 한가운데 있었으니까. 그것은 베아트리체와 함께 시작되었다. 그러나 얼마 전부터 나는 내가 그린 그림과 데미안에 대한 생각과 함게 너무나 비현실적인 세계 속에 살고 있었기 때문에 나는 그 여자를 완전히 잊어버리고 말았다. 나는 아무에게도 내 꿈과 내 기대와 내 변화에 관해서 한 마디도 말할 수가 없었다. 설사 내가 원했을지라도······. 그러나 내가 그것을 어떻게 원할 수 있었을까?


pg. 89

'신적인 것과 악마적인 것을 결합하는 것'이라는 말이 내 속에 반향을 일으켰다. 바로 이 점에 나는 생각을 결부시킬 수 있었다. 그것은 우리의 우정의 마지막 시기에 데미안과의 대화에 의해서 나에게 친숙해진 사상이었다. 그 당시 데미안은 우리는 우리가 숭배하고 있는 신을 가지고 있으나 그 신은 세계의 제멋대로 절단된 절반(그것은 공적인, 허용된 '밝은' 세계였다) 만을 나타내고 있다고 말하고, 우리는 세계를 전체로서 숭배할 수 있어야 하므로 동시에 악마이기도 한 신을 갖거나 또는 신에 대한 숭배와 함께 악마에 대해서도 숭배해야 한다고 말했다. 그런데 바로 아프락사스가 신이면서 동시에 악마인 것이다.

얼마 동안 나는 대단히 열심히 그 흔적을 더듬어갔으나 조금도 앞으로 나아가지 않았다. 나는 도서관을 모조리 뒤져서 아프락사스를 찾았으나 헛수고였다. 그러나 본질은 이런 종류의 의식적이고 직접적인 모색에는 별로 맞지 않았다. 이런 모색에서 우리는 언제나 손 안에서 돌멩이에 지나지 않은 진리를 발견할 뿐이니까.


pg. 91

나는 내년 봄에 김나지움을 졸업하면 대학에 갈 예정이었으나, 나는 아직도 어느 대학에서 무엇을 공부할 것인가를 정하지 못하고 있었다 내 입술 위에는 옅은 수염이 자랐고 내 키는 다 컸으나, 나는 어떻게 할지 전혀 갈피를 못 잡고 있었고 목적도 없었다. 뚜렷한 것은 다만 한 가지였다. 그것은 내 마음속에서 속삭이는 목소리와 그 꿈의 모습이었다. 나는 그것이 인도하는 대로 맹목적으로 따라야 한다는 의무감을 느꼈다. 그러나 그렇게 하는 것은 나에게는 어려웠으며 나는 매일 그것을 거부했다. 어쩌면 나는 미쳤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한 일도 한두 번이 아니었다.

또는 나는 어쩌면 다른 사람과는 다른지 모른다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 그러나 나는 다른 사람들이 할 수 있는 일을 전부 할 수 있다. 약간의 근면과 노력만 있으면 플라톤의 작품을 읽을 수 있고, 삼각함수의 숙제도 풀 수가 있고, 화학 분석도 할 수 있었다. 다만 한 가지만을 나는 할 수 없었다. 나의 내부에 숨겨져 있는 목적을 끄집어내어 다른 사람이 하듯이 내 앞에 그리는 일만은 할 수가 없었다. 다른 사람들은 그들이 교수나 판사나 의사 또는 얘술가가 되겠다는 것을 정확하게 알고 있었고, 얼마나 시일이 걸릴 것이며 그것이 주는 이익이 무엇인가도 알고 있었다. 나는 할 수가 없었다. 어쩌면 나도 언젠가는 그 와 비슷한 사람이 될지 모르지만 어떻게 내가 그것을 지금 알 수 있을 것인가. 어쩌면 나는 몇 년 동안 노력하고 또 노력해도 아무것도 되지 않고 아무 목적에도 도달하지 못할지도 몰랐다. 또는 어떤 목적에 도달하더라도 그것이 나쁘고 위험하고 끔찍한 목적일 수도 있지 않은가.

나는 내 내부로부터 스스로 쏟아져나오려는 것만을 잘 알아보려고 한 것인데, 왜 그것은 그다지도 힘든 일이었을까?


pg. 93

외적으로는 나는 안전한 상태에 있었다. 나는 인간에 대해서는 아무 두려움도 느끼지 않았다. 내 동급생도 그것을 알고 그들은 나에게 은연중에 존경을 보였는데 그것은 나에게 미소를 자아내게 했다. 내가 원하기만 하면 나는 그들의 대부분을 매우 잘 통찰할 수가 있었고 그럼으로써 그들을 때때로 놀라게 했다. 그러나 그럴 마음이 내키는 일이 거의 없었다. 나는 언제나 나에 대한 생각에 잠겨 있었다. 언제나 나 자신을 생각했다. 그래서 마침내 조금 살아볼 것을, 또 나의 내부로부터 무엇을 꺼내서 세계에 줄 것을, 세계와의 관련 속에, 투쟁 속에 들어설 것을 몹시 갈망하게 되었다. 때때로 저녁 거리를 쏘다니다가 내심의 동요 때문에 자정녘까지 귀가할 수 없었을 때 나는 종종 생각했다. 지금 바로 내 애인이 나를 만나기 위해서 저 길 모퉁이를 돌고 있고, 유리창에서 나를 부르고 있다고. 때때로 나는 이 모든 일이 참을 수 없이 고통스럽게 느껴졌다. 나는 언젠가 자살할 각오를 하고 있었다. 


pg.108

" (중략) 당신이 죽이고 싶어하는 사람은 아무개 씨가 아니라 다만 옷을 바꾸어 입은 것에 불과합니다. 우리가 어떤 인간을 증오할 때 우리는 그의 모습 속에서 우리들 내부에 들어 있는 무엇을 찾아내고 증오하는 것입니다. 우리들 내부에 없는 것은 우리를 흥분시키지 않습니다."

피스토리우스가 이와 같이 나의 가장 큰 비밀을 깊숙이 찌르는 말을 한 것은 이것이 처음이었다. 나는 대답할 수가 없었다. 그러나 나를 가장 강하게, 그리고 이상한 느끼믕로 뒤흔든 것은, 그의 말과, 몇 해나 내가 잊지 않고 간직하고 있는 데미안의 말과의 일치성이었다. 그들은 서로 알고 있지 않았으나 서로 똑같은 말을 했다.

"우리가 보는 사물은......" 피스토리우스는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우리의 내부에 있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 우리가 내부에 가지고 있는 것 이외에는 다른 현실이란 없습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외부의 그림을 현실이라고 생각하고, 그들 내부에 있는 그들 자신의 세계에 말하도록 내버려두지 않기 때문에 그처럼 비현실적으로 사는 것입니다. 그렇게 살아도 행복하게 살 수는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한 번 다른 것을 알고 나면 우리는 다른 사람들이 길을 가는 것을 선택할 자유가 없어집니다. 싱클레어, 대부분의 사람들의 길은 쉽고 우리의 길은 어렵습니다 - 그래도 우린 갑시다."


pg. 117

누구나가 그의 아버지, 그의 스승과 헤어지는 발걸음을 내디뎌야 하며, 누구나가 -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것을 참지 못하고 다시 움츠러들고 말지만 - 고독의 냉혹함을 느껴야만 한다. 나는 양친과 그들의 세계, 내 아름다웠던 어린 시절의 '밝은 세계'와 격력한 투쟁 속에서 헤어진 것이 아니다. 그것은 나에게 미안한 느낌을 주었고 내가 고향을 찾을 때마다 종종 괴로운 시간을 자아냈으나 가슴이 메어지도록 심하지는 않았으며 견디어낼 만한 것이었다.

그러나 우리가 습관에서가 아니라 자기 자신의 내적 욕구로 사랑과 공경에 바쳤을 때, 우리가 마음속에서부터 제 주류(主流)가 우리를 애인으로부터 분리시키려는 것을 인식할 경우에는 더없이 괴롭고 끔찍한 순간이 아닐 수 없었다.

그런 경우에는 친구와 스승을 배척하는 모든 생각이 독가시가 되어서 우리 자신의 심장을 찌르고 온갖 방위의 회초리가 우리 자신의 얼굴을 친다. 그때에 세속의 도덕을 자기 자신 속에 간직하고 있다고 생각하고 있던 우리에게, '불성실', '망은' 같은 말이 마치 파렴치한 호칭이나 낙인처럼 떠오르고, 그때 우리들의 놀란 심장은 유년 시절의 애정에 넘친 골짜리고 다시 도망간다. 그리고 그것과도 이미 우리가 이별했으며 그 유대도 끊어져야 할 성질의 것임을 파악하지 못한다.


pg. 126

몇 주일 뒤에 나는 H대학에 등록했다. 모든 것이 나를 실망시켰다. 내가 수강한 철학사 강의는 대학생들의 행동과 마찬가지로 비본질적이고 기계적이었다. 모든 것이 아주 판에 박힌 것 같이 보였다. 누구나가 똑같은 행동을 했고, 열기 띤 명량한 소년 같은 얼굴 표정은 모두가 똑같이 덜돼 보였다. 그러나 나는 자유로웠다. 나는 하루 종일 혼자 있었다. 조용하고 쾌적하게 고도시의 성곽 내에서 살았고, 내 책상 위에는 니체의 책이 몇 권 놓여있었다. 나는 그와 함께 살았다. 나는 그의 영혼의 고독을 느꼈고, 그를 쉴새없이 몰아낸 운명을 짐작했고, 그와 함께 괴로워했다. 나는 그처럼 가차없이 자기의 길을 간 사람이 있다는 것을 행복하게 생각했다.


pg. 130

(중략)) 시내에는 집으로 가는 학생들이 여기저기 소리를 지르고 비틀거리고 있었다. 나는 종종 그들의 유쾌하며 우스꽝스러운 태도와 나의 고독한 생활 사이에 대립을 느꼈었다. 그것은 나를 종종 결핍의 느낌이나 조롱의 마음으로 채웠었다. 그러나 나는 아직 한 번도 오늘처럼 고요와 신비한 힘을 가지고 모든 것이 나하고 얼마나 상관 없는 일인가를, 그리고 이 세계가 나에게서 얼마나 멀리 사라진 존재인가를 느낀 일은 없었다. 나는 고향 도시에 있는 관리의 기억이 났다. 늙고 위풍있는 신사인 그는, 술집에서 보낸 그의 대학 시절의 추억이 마치 행복한 기념품이기나 한 것처럼 애착을 느끼고, 지금은 사라져버린 대학생 시절의 '자유'에 대해서 마치 시인이나 소설가가 그들의 유년기에 대해서 하듯이 예찬을 바치고 있었다. 어디서나 그들은 '자유'와 '행복'을 지난 자취 어느 곳에서나 찾는다. 그들 자신의 의무를 상기시키고 그들 자신의 길로 가라고 충고받을까봐 두려워서······. (중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