돌이킬 수 없었다
- 허수경
언젠가
돌이킬 수 없는 일이 있었다
치욕스럽다, 할 것 까지는 아니었으나
쉽게 잊힐 일도 아니었다
흐느끼면서
혼자 떠나 버린 나의 가방은
돌아오지 않았다
비가 오는 것도 아니었는데
머리칼은 젖어서
감기가 든 영혼은 자주 콜록거렸다
누런 아이를 손마디에 달고 흔들거리던 은행나무가 물었다, 나, 때문인가요?
첼로의 아픈 손가락을 쓸어주던 바람이 물었다, 나, 때문인가요?
무대 뒤편에서 조용히 의상을 갈아입던 중년 가수가 물었다, 나, 때문인가요?
누구 때문도 아니었다
말 못 할 일이었으므로
고개를 흔들며 그들을 보냈다
시간이 날 때마다 터미널로 나가
돌아오지 않는 가방을 기다렸다
술냄새가 나는 오래된 날씨를 누군가
매일매일 택배로 보내왔다
마침내 터미널에서
불가능과 비슷한 온도를 가진
우동 국물을 넘겼다
가방은 영원히 돌아오지 않을 거라는
예감 때문이었다
그 예감은 참, 무참히 돌이킬 수 없었다
출처: 허수경, 누구도 기억하지 않는 역에서, 문학과지성시인선490, 201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