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일에서 말기암으로 투병 중이던 허수경 시인이 3일 별세했다. 향년 54세.
이 티스토리에도 썼었지만 허수경 시인의 시를 참 좋아했다.
<포도>란 시를 가장 좋아했지만, 오늘은 이 시를 꺼내 읽어본다.
포도나무를 태우며
허수경
서는 것과 앉는 것 사이에는 아무것도 없습니까
삶과 죽음의 사이는 어떻습니까
어느 해 포도나무는 숨을 멈추었습니다
사이를 알아볼 수 없을 만큼 살았습니다
우리는 건강보험도 없이 늙었습니다
너덜너덜 목 없는 빨래처럼 말라갔습니다
알아볼 수 있어 너무나 사무치던 몇몇 얼굴이 우리의 시간이었습니까
내가 당신을 죽였다면 나는 살아 있습니까
어느 날 창공을 올려다보면서 터뜨릴 울분이 아직도 있습니까
그림자를 뒤에 두고 상처뿐인 발이 혼자 가고 있는 걸 보고 있습니다
그리고 물어봅니다
포도나무의 시간은 포도나무가 생기기 전에도 있었습니까
그 시간을 우리는 포도나무가 생기기 전의 시간이라고 부릅니까
지금 타들어가는 포도나무의 시간은 무엇으로 불립니까
정거장에서 이별을 하던 두 별 사이에도 죽음과 삶만이 있습니까
지금 타오르는 저 불길은 무덤입니까 술 없는 음복입니까
그걸 알아볼 수 없어서 우리 삶은 초라합니까
가을달이 지고 있습니다
시집 『누구도 기억하지 않는 역에서』
정거장에서 이별을 하던 두 별 사이에도 죽음과 삶만이 있습니까.
그래서, 그래서 우리 삶은 초라합니까.
어느 해 포도나무는 숨을 멈추었고, 가을달은 지고 있습니다.
부디 좋은 곳으로 가시길.